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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바른길 시리즈 다섯 편을 출간한 필자는
글을 써는 전문가가 아니라,
본인이 공부한대로 자연에서 배운대로,
나름대로의 소임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본인은 어느 종교나 철학의 경전에 대한 선입관도 없으며,
어디에도 얽매일 게 없는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너무 직설적일 수는 있으나,
아주 쉽고 간단, 명료하게
써내려갔다고 본다.
현대인은
현대에 맞는 의식과 가치관을 가지면서
제자리에 머물지 않으며,
매순간 어떻게,
무엇을 우선적으로 해야할 지를 잘 안다.
또한 의심과 확신을 통해
스스로 성숙,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 또한 익히 잘 알고 있는 부분이다.
그것은 수많은 경전과
앞서간 선각자들이 무수히
강조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분명 그 시대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 수준과 가치관에 맞는 공부였고, 가르침이다.
지금 시대의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이미 녹아들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금 시대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랑”을 하고,
찾고, 키우면 된다.
그것을 올바르게 행하고 키우려면
“마음씀씀이”를 잘 나타내어야 한다.
그게 인생 삶, 즉 수행이다.
살아있는 동안
반드시 나의 마음보따리를
잘 챙겨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게 인생성적표를 올리는 것이며,
덤으로 나의 건강과 행복이 주어지며
여유롭고 풍요로운 삶과 마주하게 된다.
결국 살아있는 동안
반드시 내가
한 만큼만,
쌓아 놓은 것만큼만,
따놓은 성적만큼만,
거기에 걸맞는
다음 생의 여행 티켓이 주어진다.
아직도 돈을 갖다 받치거나
기부를 하면서
산자나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스스로의 위안과 위로를 가지며
흡족해하는 것을 가까운 주변에서 흔히 본다.
수행의 바른 길 관점에서는
돈 받는 자보다
돈 갖다 받치는 자가
더 어리석고 나쁠 수가 있으며,
무심코 던진 돌이 개구리가 맞아 죽기도 하나,
거기에 있었던 개구리가
더 잘못된 것일 수가 있다는 말이다.
“성불해라”가 아니라
“사랑해라” 라고 하는게 이치에 맞는 말이다.
이미 보편화된 말이기도 하며
이미 엎지르진 물일 수도 있으나,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성직자나 철학자로서나 학문을 깊게 했다고 해서
진리의 종착역인 그 하나에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연에서 인정하는
점수를 반드시 따야한다.
그것은 인간은 관여할 수없고,
알 수없는 영역이며,
자연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있다.
자연은 진실인 것과 아닌 것,
거짓과 참 둘 다 심어놓았다.
상황설정이 그렇게 되어있다는 말이며,
몸기계를 가진 인간은
자연이 순리라,
거기에 순응할 수 있을 때
바른 길을 찾아
잘살 수있게 된다는 말이다.
각자가 나타내는 마음 씀씀이는
사람이나 부딪치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한평생
다듬어지고 두리뭉실해져서,
이리저리 부딪쳐도
덜 힘들고
덜 어렵고
덜 아프게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면서
하고자 하는 바,
얻고자 하는 바,
필요로 하는 바들을
성취하면서,
때가 되어
다시 돌아간다.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삶의 원동력인 “믿음”은 그 속에서
그렇게 만들어지고 다져지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그래서
“믿음”이란
“삶의 체험”에서 나온다.
뭘 외우고, 돌리고, 두드리고, 읽거나 쓰는 것이나,
한평생 열심히 기도만 한다는 것은
믿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
또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의식 수준과 정도에 맞추어
인연에 따라 자연에서 보여주는 것이기에,
거기에 따른 소명을 알아차리고
유용하게 쓰임이 되어야하며,
아닌 것은 자신에게 해로 돌아올 수도 있다.
그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돌아오기에
스스로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본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인연으로
마주하게 되는 신의 축복이며,
은총임이 분명하나,
그 쓰임이 부족하거나 잘못되면
스스로 만든 구렁텅이에 자신도 모르게 들어간다.
그래서 볼 수있게 되면
그것은 각자의 수준에 맞는 공부를
해갈 수있도록 자연이 주는
깨달음의 방편(적절한 그림이나 동영상)이
될 수 있기에,
남이 볼 수없는 것을 내가 볼 수있다고 해서
그것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재단하듯이 “이게 맞다”라고 나타낸다면
충분하지 못할 돌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기 소임을 알아채고 묵묵히 해나가되,
다수에게 나타내어야 한다면
나는 그렇게 혹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평범한 자기 견해로서
나타낼 수 있다면,
상대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게 되어
나도 좋고 상대도 좋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깨달아간다는 것은
각자 할 따름이다.
여전히 수백 수천년 된 탱화 속 모습이나 용어들을,
21세기 현대의 가치관과 의식 속에 살아가면서,
기도 속에 본 것이나 그 당시의 의식 수준을,
그대로 나타낸다면
자칫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보여질 수도 있게 된다.
우리가 아는 수많은 보살과 천사들
모두 빛의 분신이며,
각기 역할로서 설명이 가능할 것이나,
지금 시대에는 그냥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충분하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나
그 어떤 주문이나 독경이라도
그것은 그 시대에 맞는 것이었다면,
지금 시대에 와서도 굳이
그런 용어로,
그런 행동으로
각자의 의식을
거꾸로, 옛날로 돌릴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각자 마음이 편한 게 우선이 되니
그것 역시 각자 할 따름이다.
관세음보살이든지 나무아미타불이나 나마스테 등
다 인간이 간절하게 바라는 것으로
모두 다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요즘 스마트폰이 거의 필수품이다.
갑자기 위급상황에서 죽음이 임박했을때,
마지막 메세지나 전화를 한다.
오고가는 급박한 말이나 메세지 속에서
사랑을 더 해야되는데,
여전히 사랑하고 있단다,
사랑을 더 못해 미안하다 등등과 같이
사랑을 찾게 된다.
“사랑”이란
인간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빛이고,
인간 삶의 알파고,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존 의식,
즉 내가 믿고있는 종교적 믿음이나
기본 상식을 벗어나지 않으면
허황되고 엉뚱한 샛길에 서서
깨달음의 착각을 쌓게 되기 쉽다.
전체를 움직이는 실체(부처님, 하느님)을 알아야한다.
그게 “이치”고 “법”이며, “진리” 그 자체를 말한다.
그것은 빛으로 인식되나,
보든지, 느끼든지, 듣든지이다.
아무리 죽을똥 살똥 한평생
새벽기도, 철야기도, 동안거, 하안거 등을 한다든지,
아무리 유명한 경전을 번역하고 외운다한들,
부처님, 하느님을
볼 수있다든지 혹은 오신다든지
하는것과는 아무상관이 없으며,
찾는다고 오시는 분도 아니다.
내가 생각을 바꾸고 기존 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엎어지고 깨어져서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의 증험을 통해
한 걸음, 한 걸음
스스로 찾아 다가서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은 나와 부딪치는 주변상황과 변화에
녹아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이여(깨달음),
그것은
내 마음 먹기 달렸다.(견성성불)
순간순간
그때그때
즉시즉시
어떻게 마음씀씀이를 나타내느냐이다.(일체유심조)
즉 마음 심보 혹은 마음보따리를 말한다.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불교나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은
해탈이나 구원이 아니라,
해탈이나 구원이 의미하는
그 마음자리(본래 마음자리)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각자 역량껏, 각자가 한 만큼,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사는 것이다.
그것도 “사랑”으로 표현하면 된다.
진리는 항상 간단, 명료하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라, 그래야 내가 산다”는 것은
그게 인간의 갈 길이며, 살 길이라는 것이며,
결국 사는 동안 잘살기 위한 이치라는 말이다.
“잘산다는 말”은
사람으로서 좀 더 보람있게,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하며,
삶의 질적 향상인 것이다.
결국
인간의식의 변화와 혁신을 말한다.
그게 인간 유사이래
모든 성인군자 가르침이며,
모든 종교와 경전의
핵심이며, 본질이다.
왜냐면
그게 각자의 영혼 성숙을 가져오며
삼라만상을 성숙, 발전시키는 기본이 되고
그게 삼라만상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돌아가는 자연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에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찾고, 사랑을 키우면 된다. 왜냐면
그게 가장 “현실적인 삶”을 만들며
결국 인간 사회의 발전과 성숙이 되는 살아있는 동안 |
■수행의 바른길 시리즈 1편-5편 내용설명 및 출간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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